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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로동당 제1차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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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조선로동당 제1차 대회는 1946년 8월 28일부터 30일까지 개최되었으며, 북조선공산당과 신민당의 합당을 통해 북조선로동당을 창당하고 김일성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회는 김일성이 주재했으며, 김두봉, 최창익 등 주요 인물들이 참여했다. 대회에서는 당의 지도부 선출, 강령 채택, 기관지 창간 등이 이루어졌으며, 801명의 대의원이 참석했다. 결과적으로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으나, 당내 민주주의를 훼손했다는 평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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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로동당 제1차 대회
대회 정보
로마자 표기Bukjoseon Rodongdang Je 1-cha Daehoe
날짜1946년 8월 28일 ~ 1946년 8월 30일 (3일간)
장소평양, 북한
참가자801명의 대표자
결과북조선로동당 제1기 중앙위원회 선출
북조선로동당 제1기 중앙검사위원회 선출

2. 배경

2. 1. 북조선공산당

2. 2. 신민당

2. 3. 합당 논의 과정

북조선로동당과 신민당의 합당은 두 정당 내에서 미온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모든 관찰자들에게 분명해진 것은 한국 공산주의자 중 대다수가 대중 정당을 창설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소련이 주장했듯이), 김일성의 지도력은 당시 공산주의 운동의 다수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측근들의 지지를 받아 승진하기보다는 소련에 의해 지도자로 임명되었다. 김두봉, 무정 그리고 최창익과 같은 신민당의 지도자들은 김일성보다 훨씬 더 한국 국민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김일성이 자신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소련이 김일성에 대한 반대는 곧 북한의 소련 민정청(북한 내 소련 행정부)에 대한 반대임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제1차 대회의 주요 간부들은 김일성을 칭찬하기 시작했고, 박병소는 한국인들에게 지도자가 필요하며 김일성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을 반동분자로 비난했다. 박정애는 평남 대표로서 박병소의 발언은 불필요하다며, 김일성은 "이미 전체 조선 인민의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이 대회를 주재하고, 정치 보고를 하고, 중앙위원회와 검사위원회에 후보자를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소련의 지원 덕분이었다. 소련 때문에 김일성의 독주에 그의 경쟁자들은 순응했고, 소련파, 국내파, 연안파 등 라이벌 파벌의 지도자들은 대회에서 작은 역할만 했다.

3. 진행 과정

3. 1. 1차 회의 (8월 28일)

김일성 (전 북조선공산당 위원장)이 주재한 제1차 회의는 3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첫 번째 안건은 대회의 임원 선출이었다. 31명으로 구성된 집행위원회, 5명으로 구성된 자격 심사 위원회, 4명으로 구성된 사무국, 5명으로 구성된 편집위원회, 5명으로 구성된 강령 위원회 및 5명으로 구성된 부칙 위원회가 선출되었다. 이와 함께, 대표들은 대회의 6개 안건에 대해 투표했다. 함경북도 대표인 허국봉은 소련 공산당(중앙위원회 서기장) 요제프 스탈린을, 일본으로부터의 한반도 해방에 대한 소련의 공헌과 앞으로의 한반도 건설 지원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대회 명예 의장으로 추대할 것을 제안했다. 북조선민주청년동맹, 조선직업총동맹, 북조선농민동맹, 조선사회민주당 대표들은 당에 축하 연설을 했다. 이 연설 후, 제1차 회의는 폐회되었다.

3. 2. 2차 회의 (8월 29일)

김두봉 신민당 (중국 출신 조선 공산주의자들로 구성) 지도자의 사회로 2차 회의가 오전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진행되었다. 회의는 연안파의 일원인 박일우의 대표단 구성에 대한 통계 보고로 시작되었다. 김일성과 김두봉은 이날 주요 연설로 대회를 진행했다. 김일성은 대한민국의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비난하며, 김구이승만의 이름을 직접 거론했고, 미국의 점령 하에 있는 남한의 전반적인 생활 수준을 비판했다. 그는 이어서 북조선로동당의 설립 이유를 설명하며, 그 목적을 노동 계급의 민주적 힘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연설은 또한 북조선로동당과 신민당의 합당을 반대했던 전 북조선 공산당원들을 비난하며, 합당을 반대하는 공산주의자들을 "자신들만이 한국의 진정한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소수의 오만한 좌익"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또한 합당이 국가의 진보 세력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북조선로동당 지도부가 당내 이념적 통일을 보장하도록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두봉의 연설은 김일성의 연설과 유사했다. 그는 북조선 공산당과의 합당을 반대했던 신민당원들을 비판했다(이들은 우익 기회주의의 오류를 범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새로 설립된 당을 강화하기 위한 5개 항의 의제를 제시하며 연설을 마무리했다.

김일성과 김두봉이 설명한 바와 같이, 합당은 양당 내의 여러 구성원들을 분노하게 했다. 그러나 합당의 배후인물인 소비에트 민정청의 알렉산드르 이그나티예프 대령이 회의에 참석하여 성공을 보장했다. 801명의 대표 중 15명이 두 연설에 대해 논의했고, 이 논의는 김일성이 합당을 승인한다는 발언으로 마무리되었다. 짧은 토론 후, 합당을 승인하고, 새로운 당의 이름을 "북조선로동당" (노동 대중의 당으로 지정)으로 명명하며, 최창익이 제안한 13개 조항의 강령을 승인하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이후 대회가 휴회되었다.

3. 3. 3차 회의 (8월 30일)

추용하의 주재로 진행된 3차 회의에서는 먼저 김용범이 당 규약 초안을 설명하고, "간단한 토론" 후 승인되었다. 그 후, 소련-조선파의 일원인 태성수는 북조선 공산당과 신민당의 기관지인 ''정로''(正路)와 ''전진''(前進)을 통합하여 조선로동당의 주요 기관지 ''로동신문''(Workers' Daily)을 창간할 것을 제안했고, 이 제안은 승인되었다. 남조선로동당 (WPSK)의 최창익은 남한 공산주의 운동의 상황, 남조선로동당의 창당, 그리고 남조선 공산당의 다른 진보 세력과의 통합에 반대했던 6명의 반대파를 남조선로동당에서 추방하기로 한 결정을 설명했고, 이 통합과 6명의 멤버 추방은 대회에서 승인되었다.

마지막으로 제1차 중앙위원회 (CC)와 제1차 검사위원회 (IC)를 선출했다. 사전에 당 지도부에 의해 승인된 중앙위원회 후보 43명과 검사위원회 후보 11명이 "각 후보가 소개된 후" 만장일치로 승인되었다. 제1차 중앙위원회에 선출된 위원 중 13명은 국내파, 12명은 연안파, 6명은 소련-조선파, 4명은 김일성 유격대 파였으며, 나머지 8명의 소속은 알려지지 않았다. 대회는 조선 인민에게 공개 서한을 발표한 후 폐회했다.

4. 제1차 중앙위원회 제1차 전원회의

4. 1. 합당의 문제점

북조선로동당과 신민당의 합당은 두 정당 내에서 미온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한국 공산주의자 중 대다수는 대중 정당 창설을 원치 않았고, 김일성의 지도력은 당시 공산주의 운동의 다수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두봉, 무정, 최창익과 같은 신민당 지도자들은 김일성보다 훨씬 더 한국 국민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김일성이 자신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소련이 김일성에 대한 반대는 곧 북한의 소련 민정청에 대한 반대임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제1차 대회에서 주요 간부들은 김일성을 칭찬하기 시작했고, 박병소는 한국인들에게 지도자가 필요하며 김일성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을 반동분자로 비난했다. 박정애는 김일성은 "이미 전체 조선 인민의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이 대회를 주재하고, 정치 보고를 하고, 중앙위원회와 검사위원회에 후보자를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소련의 지원 덕분이었다. 소련 때문에 김일성의 독주에 그의 경쟁자들은 순응했고, 소련파, 국내파, 연안파 등 라이벌 파벌의 지도자들은 대회에서 작은 역할만 했다.

4. 2. 지도부 선출

조선로동당 제1차 중앙위원회 제1차 전원회의는 1946년 8월 31일에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 1차 정치위원회(5인으로 구성)와 당 위원장(정치위원회 위원 겸임) 및 두 명의 부위원장을 선출했다. 중앙위원회 위원들이 김일성 대신 김두봉을 위원장으로 선출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김일성김두봉에게 명예직으로 위원장 자리를 양보했거나, 비밀 투표로 투표한 중앙위원회 위원들이 가장 선호하는 후보를 선택했을 가능성이 있다. 어떤 경우든, 김두봉이 당의 최고위직에 오른 것은 그의 실제 권력을 반영하지 않았으며, 김일성김두봉 위원장 체제 하에서 ''실질적'' 지도자였다. 김일성과 주영하가 당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소련계인 허가이와 연안파 출신인 최창익이 나머지 3명과 함께 제1차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5. 결과 및 영향

5. 1.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

5. 2. 김일성 권력 강화

5. 3. 당내 민주주의 훼손

6. 통계

1946년 8월에 열린 북조선로동당 제1차 대회에는 당원 366,339명을 대표하여 801명의 대의원이 참석했다. 이들은 12,000개의 당세포와 지방 조직에서 선출되었다. 당시 당원은 전체 인구의 4%를 차지했다.

대표자들의 연령대는 20대 229명, 30대 417명, 40대 129명, 50대 이상 26명이었다. 직업별로는 노동자 183명, 농민 157명, 사무직 385명, 기타 76명으로 구성되었다.

대표자 다수(359명)는 고등학교 교육을 받았으며, 228명은 초등학교, 214명은 대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았다. 대표 중 291명(36%)은 일제강점기에 투옥된 경험이 있었고, 427명(53%)은 해외에서 체류했다.

6. 1. 대표 구성

1946년 8월에 열린 북조선로동당 제1차 대회에는 당원 366,339명을 대표하여 801명의 대의원이 참석했다. 이들은 12,000개의 당세포와 지방 조직에서 선출되었다. 당시 당원은 전체 인구의 4%를 차지했다.

대표자들의 연령대는 20대 229명, 30대 417명, 40대 129명, 50대 이상 26명이었다. 직업별로는 노동자 183명, 농민 157명, 사무직 385명, 기타 76명으로 구성되었다.

대표자 다수(359명)는 고등학교 교육을 받았으며, 228명은 초등학교, 214명은 대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았다. 대표 중 291명(36%)은 일제강점기에 투옥된 경험이 있었고, 427명(53%)은 해외에서 체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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